형제라는 이름의 감옥

— 부산 형제복지원 인권유린 사건
1970~80년대 대한민국 부산에는 **‘형제복지원’**이라는 시설이 있었다.
이름만 보면 따뜻한 복지시설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 그 안에서 벌어진 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인권유린 사건 중 하나였다.
이 사건은 단순한 복지시설의 일탈이 아니라
국가 권력, 사회의 무관심, 그리고 종교적 권위가 뒤엉켜 만들어낸 구조적 비극이었다.
“거리 정리”라는 이름의 대규모 수용
형제복지원은 처음에는 고아원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1975년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부산시는 이 시설과 계약을 맺고
부랑인 수용시설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상황이 크게 바뀐 시기는
1980년대 군사정권 시기였다.
당시 정부는
- 1986년 1986 Asian Games
- 1988년 1988 Summer Olympics
같은 국제행사를 앞두고
도시 미관을 정비한다는 이유로 거리 단속을 강화했다.
그 결과 경찰은
- 노숙인
- 고아
- 장애인
- 길거리 청소년
심지어 단순히 집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향한 곳이 바로 형제복지원이었다.
“기독교 복지시설”이라는 외관

이 시설의 운영자는
Park In-geun
그는 장로교 교회에서 **권사(또는 장로급 지도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형제복지원 역시 겉으로는
“기독교 정신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복지시설”
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설 안에서는
- 기독교 예배 참석 강요
- 신앙 행사 참여 강요
같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더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당시 부산 지역의 일부 교계 단체들은
이곳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 적극적으로 폭로하지 않았고
- 제지하지도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침묵은 결국 사건을 더 오래 지속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시설 안에서 벌어진 일
형제복지원은 사실상 거대한 강제수용소였다.
1975년부터 1987년 사이
한때 3,000~4,000명이 동시에 수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 불법 감금
- 강제노동
- 폭행과 고문
- 성폭력
시설 운영진은 군대식 계급 체계를 만들어
일부 수용자를 감시자로 삼았다.
이들은 다른 수용자를 감시하고 폭행하며
시설의 통제 체계를 유지했다.
공장처럼 돌아간 강제노동
수용자들은 단순히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으로 이용됐다.
시설 안에는 여러 작업장이 있었다.
예를 들어
- 목공
- 금속 작업
- 봉제
- 어망 제작
등 약 20여 개의 작업장이 운영됐다.
수용자들은 임금 없이 일했다.
그 노동의 이익은 대부분
시설 운영자에게 돌아갔다.
폭력은 일상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시설 안에서 폭력은 매우 흔했다.
사소한 실수에도
- 집단 구타
- 고문
- 장시간 노동
같은 처벌이 뒤따랐다.
어린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10대 아이들이
20~30kg 모래 자루를 나르는 노동에 투입되기도 했다.
버티지 못하면
폭행이 이어졌다.
수백 명의 죽음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1987년 국회 조사에 따르면
1975년부터 1987년 초까지
513명
이 시설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추가 조사에서는
최소 550명 이상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부 시신은
- 가족에게 통보되지 않았고
- 암매장되거나
-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처리된 정황도 있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종종 이렇게 불린다.
“한국 현대사의 최악의 인권유린 사건”
사건은 왜 오래 숨겨졌을까
이 사건이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여러 요인이 겹쳤다.
1️⃣ 정부의 은폐
1987년 수사가 시작됐을 때
군사정권 실세였던
Chun Doo-hwan
정부 측에서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적 망신이 될 수 있다”
며 수사를 축소하라는 압력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수사는 크게 축소됐다.
2️⃣ 사법적 책임 회피
시설 운영자 박인근은
불법 감금 혐의에 대해
1989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일부 횡령 혐의로만 짧은 실형을 살았고
이후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핵심 범죄에 대한 책임은
사실상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다.
3️⃣ 사회와 종교의 침묵
또 하나의 문제는
사회적 침묵이었다.
박인근은 오랫동안
- 복지사업가
- 자선가
-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인물
이라는 이미지로 포장돼 있었다.
그 결과
- 교계
- 지역 사회
- 행정기관
모두가 이 시설을 쉽게 의심하지 않았다.
혹은 의심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뒤늦게 드러난 국가 책임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사건은 다시 조사됐다.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Korea
의 조사에 따르면
- 국가가 사건 이후 사실 규명을 방해했고
- 학대 규모를 축소하려 했던 정황
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이 사건이 남긴 질문
형제복지원 사건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은 지금도 이런 질문을 던진다.
“선의라는 명분은 권력을 얼마나 쉽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종교적 자선 담론은 때로
- 감시를 느슨하게 만들고
- 권력을 비판하기 어렵게 만들며
- 피해자의 목소리를 묻어버리기도 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바로 그 위험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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