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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뉴스

SUV에 올라탄 주교들 – 필리핀 ‘파제로 주교’ 스캔들이 남긴 불편한 질문

🚗 SUV 한 대가 드러낸 교회와 권력의 민낯

― 필리핀 ‘파제로 주교’ 사건을 다시 읽다

2011년 여름, 필리핀 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름부터 묘하게 웃픈 ‘파제로 주교들(Pajero Bishops)’ 사건입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 무대는 정부 복권기금, 소품은 고급 SUV였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를 말하던 주교들이, 정부로부터 국고로 산 차량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죠.

필리핀 주교단


🧾 사건의 골자: “선물”이라는 이름의 국고 지원

이 사건은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재임 2001~2010)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녀가 퇴임한 뒤인 2011년 6~7월, 새 정부와 언론, 그리고 상원 청문회를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폭로 내용은 이랬습니다.

  • 필리핀 정부 산하 **복권공사(PCSO)**의 자금이
  • 가톨릭 주교 몇 명에게
  • ‘차량 구입 지원’이라는 형태로 제공되었다

7명 내외의 주교,
금액으로는 약 690만 페소 이상,
차종은 필리핀에서 부와 특권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미쓰비시 SUV들이었습니다.


✉️ “생일 선물로 SUV 하나 부탁드립니다”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후안 데 디오스 푸에블로스 주교였습니다.
그는 2009년, 자신의 66세 생일을 앞두고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냅니다.

“사목 활동에 사용할 차량이 필요합니다.”

결과는?
약 170만 페소 상당의 SUV 한 대, 깔끔하게 배달 완료.

물론 공식 명목은 “사목과 구호 활동용”.
하지만 국민 눈에는 이렇게 보였습니다.

“국민 세금 → 복권기금 → 대통령 → 주교 → 개인 차량?”

그리고 여기서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튀어나옵니다.


⚖️ 헌법 위반 소지: 정교분리, 어디 갔나요?

필리핀 헌법 제6조 29항은 분명히 말합니다.

“공금이나 국유 재산은 어떠한 종교의 사용이나 지원을 위해서도 지출될 수 없다.”

즉,

  • 의도가 선하든
  • 실제로 봉사에 쓰였든

국고가 종교 지도자 개인에게 제공되는 순간, 위헌 논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단지 “차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국가 권력과 종교 권력이 조용히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침묵의 대가였을까?

사건이 더 씁쓸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아로요 정부 시절,
가톨릭 교회는 각종 부패 의혹과 권위주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따라붙었습니다.

“혹시 이 ‘선물들’이,
정권 비판을 자제해 준 대가였던 건 아닐까?”

증명되진 않았지만,
의심만으로도 교회의 도덕적 권위에는 충분히 큰 상처였습니다.


🔄 사태 수습: 빠르긴 빨랐다

여론이 폭발하자, 주교들은 발 빠르게 움직입니다.

  • “차량을 전부 반납하겠다”
  • “작은 차를 타도 괜찮다”
  • “법적 문제가 된다면 책임지겠다”

그리고 **필리핀 가톨릭주교회의(CBCP)**는
2011년 7월 11일, 공식 사과문을 발표합니다.

“우리 몇몇 주교들의 행동이 교회에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이 부분은 분명 이례적이었습니다.
은폐 대신 인정, 침묵 대신 사과를 택했으니까요.


🤔 하지만 남는 질문들

그럼에도 비판은 남았습니다.

  • 왜 이런 관행이 그동안 조용히 이어질 수 있었는지
  • 왜 문제의식은 외부 폭로 후에야 작동했는지
  • 사과는 있었지만, 구조적 책임은 어디까지 물었는지

일부 평론가들은 CBCP의 사과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책임 고백이라기보다는, 유감 표명에 가깝다.”


🎭 ‘파제로 주교’라는 별명

필리핀 언론은 이 사건에 강력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파제로 주교들’.

파제로는 필리핀에서
“잘 나가는 사람”, “특권층”의 상징 같은 차입니다.

그 결과,

  • 풍자만화
  • 조롱 섞인 칼럼
  • 실망한 신자들의 헌금 거부 언급까지

교회를 감싸던 도덕적 아우라는, 그날 이후 크게 흔들렸습니다.


📉 교회의 정치적 발언권도 함께 추락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스캔들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정부는 교회가 반대하던 인구조절법(RH법안) 논쟁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교회도 완벽하지 않다.
도덕적 우월성만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는 없다.”

교회 스스로 정치적 무기를 내려놓은 셈이었죠.


🧭 결론: 문제는 차가 아니라 ‘거리’였다

이 사건의 핵심 교훈은 명확합니다.

  • 문제는 SUV가 아니라
  • 문제는 권력과 너무 가까워진 종교였습니다.

종교가 권력과 재물에 가까워질수록,

  • 예언자적 목소리는 작아지고
  • 신뢰는 빠르게 증발합니다.

‘파제로 주교’ 사건은 말합니다.

교회가 정말로 가난한 이들 편에 서고 싶다면,
먼저 권력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설 용기가 필요하다고.

웃으며 읽을 수는 있지만,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